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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산유곡의 전형을 보여주는 학심이골. 자연미 넘치는 골짜기에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더욱 깊고 신비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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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의 여름은 오묘했다.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웅장했다. 폭우로 물이 넘친 골짜기는 큰 소리로 울어댔다. 반면 영남알프스 맹주 가지산(加智山·1,240m)은 며칠째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 억눌려 숨 죽이고 있었다.
구름이 벗겨지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자 순간 모든 게 변했다. 햇살이 내리쬐자 가지산 산릉은 불쑥 일어섰다. 그리곤 꿈틀거리며 굵고 기운찬 산줄기를 사방으로 뻗쳤다. 한 갈래는 서쪽 운문산(雲門山·1,188m)으로 뻗어 내리며 남쪽 밀양과 북쪽 청도를 감싸안고, 또 한 갈래는 동쪽 상운산(上雲山·1,117m)과 남동쪽 석남고개로 뻗으면서 낙동정맥을 이어나갔다. 다른 능선들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능선들은 정상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뻗어내리고 그 사이사이 깊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놓았다. 거기서 맑은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신비감과 웅장함 곁들인 학심이골
“벌써 한여름이네요. 저 사람들 좀 보세요.”
양산 산악인들과 함께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640m)을 넘어 청도 땅으로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전날 밤 고속도로는 정상속도를 내기 어려울 만큼 폭우가 퍼부어댔는데도 도로변 물가에는 피서객들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한갓지리라 예상했던 운문산자연휴양림은 놀라울 만큼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천문사 입구도 매한가지. 민박·펜션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캠핑장은 오색 텐트로 꽉 채워져 있다. 이제 7월 초인데 벌써 한여름 피서철 같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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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산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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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좋네요. 물도 콸콸 흘러내리고. 너무 감탄해하지 마세요. 이 배넘이골은 서곡에 불과해요. 학심이골이 진짜예요.”
사뭇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천문사(天門寺)를 지나 배넘이골로 들어서는 순간 180도로 바뀌었다. 울창한 숲은 거센 물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고색창연한 빛깔의 바윗덩이가 뒤엉킨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치 숲을 뚫고 나오는 듯 활기차고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 풍광에 감탄스런 표정을 짓자 이상배(양산등산교실 학감)씨는 배넘이재 너머 운문학심이골 풍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물줄기를 벗어나 된비알을 10여 분 올려치자 배넘이재 고갯마루. 널찍한 고갯마루에는 ‘운문산 생태보전지역’ 안내판이 서 있다. 가지산~운문산 능선 북쪽은 운문산 군립공원으로서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이로 인해 환경 훼손을 일으키는 행위는 일절 금지돼 있고, 때문에 자연경관이 잘 살아 있다.
“운문사에서 위로 올라가는 건 막아도 하산하는 건 아무 소리 안 해요. 그래서 배넘이재를 넘어 학심이골이나 심심이골 혹은 북릉을 타고 가지산 정상에 오르거나 아니면 가지산~운문산 능선에서 운문사 쪽으로 내려서요.”
고갯마루를 넘어 20분쯤 내려섰을까, 우렁찬 물소리와 더불어 산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햇살이 부챗살처럼 내리쬔다. 해는 참으로 신비롭다. 우중충한 날씨에 침울해진 사람의 기분을 환하게 바꿔줄 뿐만 아니라 대자연을 움직인다. 빛은 생명력이다. 그 빛을 받은 학심이골은 힘이 넘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커다란 바윗덩이마다 짙푸른빛을 띠며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 바윗덩이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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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문사 석불. 곳곳에 석불이 놓여 있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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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양산등산교실을 나온 ‘양산 아지매’들이 정성스럽게 싸가지고 온 밥과 반찬으로 배를 든든히 불린 뒤 개울을 가로질러 학심이골을 거슬러 오른다. 골짜기는 곧 좁아지고 가팔라지면서 원시적인 분위기에 세련미까지 더한다. 협곡 한쪽은 기암절벽이 장식하고 반대편은 울창한 숲이 우거진 가운데 거센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커다란 바윗덩이 징검다리를 건너서자 산길이 한층 넓어지면서 가팔라진다. 골을 울리는 물소리에 골 안에 무슨 비경이 숨어 있는가 싶어 샛길 따라 협곡으로 내려서자 묘한 형상의 폭포가 반겨 준다. 숲속 샘에서 펑펑 솟아오른 듯한 물줄기는 커다란 바윗덩이 두 개를 끼고 흘러내린 뒤 오른쪽으로 휘어진 바위 골 타고 몸을 뒤틀었다가 절벽 위에서 점프를 시도한 다음 푸른 소로 잠겨 든다.
협곡을 빠져나와 다시 산길로 접어들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파아란 하늘이 펼쳐지고 그 아래 푸른 산릉이 빛나면서 산은 한층 아름답고 기운찬 풍광을 과시한다. 마치 1970년대 중반 시설물이 전혀 들어서지 않아 원시미를 자랑하던 설악산 십이선녀탕을 오르는 기분이다.
“여기서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서죠. 그래야 골짜기를 제대로 봐요.”
징검다리를 건넌 이후 두 번째 목책 직전 이상배씨는 널찍한 등산로에서 벗어나 오른쪽 샛길로 일행을 안내한다. 바윗돌에 빨간 페인트로 표시된 화살표를 따르자 곧 지계곡을 가로지른 뒤 협곡으로 내려선다. 악마의 이빨인들 저렇듯 험악스러울 수 있을까? 물줄기는 일행을 빨아들일 듯한 분위기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져 내리면서 일행의 몸을 싸늘하게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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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심이골 초입의 계류를 가로지르는 양산 등산인들.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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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잠시 차분한 분위기의 계곡이 나타나자 등산교실 동기생인 배수연씨와 여상순씨는 배낭에서 참외에 자두를 꺼내놓고 일행의 입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힘 받아 다시 짤막한 지능선을 넘어서자 허연 포말이 우리를 덮칠 듯 쏟아져 내린다. 학이 깃들어 살았다고 전하는 학소대(鶴巢臺) 제1폭포다. 수원이 보이지 않는 허연 물줄기는 바위협곡을 비집고 나와 그 아래 3단 폭포에서 완급을 거듭하며 쏟아져 내리다가 푸른 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두 줄기로 나뉘어 쏟아지면서 멋들어진 와폭을 만들고 있다.
“원래 오늘 천화대 등반이 계획돼 있었는데 아쉬움이 전혀 없네요.”
등산학교를 다니면서 바위맛에 흠뻑 빠진 배수연씨와 여상순씨는 어제 오전에 만날 때부터 천화대 암릉 등반을 못 해 아쉬워하더니 학소대폭포를 보는 순간 그 아쉬움을 떨쳐내 버린다.
학소대 제1폭포 위쪽에서 물줄기 한 차례 건너고, 또 다시 물줄기를 건넌 다음 30분가량 계곡으로 이어지던 산길은 어느 순간 지능선으로 올라붙더니 물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머리끝부터 바짓가랑이까지 땀에 푹 젖어들 즈음 능선마루로 올라선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서도
너른 들녘 끼고 있어 더욱 아름다운 산
오후 7시, 운문령에서 쌀바위까지 이어지는 임도 위에 올라서자 된비알 구간이 거의 다 끝났다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편안해졌다가 급해진다. 계획대로 가지산 산정에서 일몰 사진을 촬영하려면 늦어도 40분 이내에 산정에 올라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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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심이골 초입의 무명폭. 이름이 없다는 게 의아스러울 정도로 웅장하고 멋들어진 폭포다. 골짜기 초입의 ‘쌍폭 포인트’를 지나 물줄기를 한 차례 건넌 다음 언덕길을 오르다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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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도 안 돼 쌀바위 아래에 도착했으나 순간 안개가 몰려오면서 시야가 꽉 막힌다. 잠시 망설이다가 고민할 게 뭐 있으랴 싶어진다. 오늘 이만한 비박지를 또 만나기 어려울 터인데. 널찍한 데크가 마련돼 있고, 바로 옆에 석간수 샘이 있고, 데크 바로 옆 바위지대는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열었을 만큼 조망이 좋은 곳인 걸. 널찍한 플라이를 치고, 배낭을 정리한 다음 버너에 불을 붙이자 양산 아지매들 배낭에선 먹거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그 음식에 일행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모른다.
서로 코고는 소리에 잠 못자겠다는 배병달씨와 황원선씨의 투덜거림에 새벽부터 잠이 달아났으나 짙은 안개를 핑계 삼아 침낭을 푹 뒤집어쓰고 있다가 6시 반이 넘어서야 침낭에서 빠져나온다. 안개는 엊저녁보다 더욱 두텁다. 맥이 빠지기는 하지만 오늘 걸을 거리가 만만찮다는 생각에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그리도 안개가 벗겨지기를 기대하면서 데크 주변과 ‘새천년 가지산 해맞이’ 기념 빗돌 옆에서 서성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오전 7시45분 가지산 정상으로 향한다.
우리만 가지산의 조망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 직전 자그마한 데크에서도 일출을 기대하며 텐트를 쳐놓고 지낸 등산객 두 명이 있었다. 이들 역시 짙은 안개에 잠이나 실컷 자자고 마음먹었는지 9시가 다 돼 가는데 도 코고는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영남알프스 맹주이자 영남 최고봉 가지산 산정은 아쉽게도 안개에 싸여 보여주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쌀바위대피소 주인이 그랬듯이 이른 아침 운문령에서 올라온 아이스크림 장사꾼들 역시 장마철인 7월 한 달은 가지산 일원은 구름안개에 휩싸여 눈에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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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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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는 마음에 산정에서 아이스크림으로 열을 식히면서 앉아 있는 사이 구름이 살짝 벗겨지더니 정상 너머 헬기장을 꽃단장해 준 텐트 넉 동이 내려다보인다. 가지산 정상대피소 명물 ‘눈썹 진돗개(일부러 그려놓은 듯 눈 위에 한일자 눈썹이 있는 개)’와 놀며 안개가 더 많이 걷히기를 기다리던 일행은 구름이 더 이상 벗겨지지 않자 헬기장으로 내려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넘이재를 넘고 가지산 북릉을 타고 이곳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울산 산꾼들이 쳐놓은 초경량 텐트를 구경하고, 또 “1년 365일 어느 날 찾아도 좋은 산”이라는 가지산 자랑을 듣는 사이 구름이 걷히면서 산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같은 영남알프스의 산봉이지만 가지산릉은 신불산이나 천황산과 달랐다. 두 산이 부드러운 산악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가지산릉은 기운찬 산세의 전형이다. 기암괴벽이 솟구치고, 푸른 숲을 뒤덮은 산릉은 기운차고 힘이 넘쳤다. 그 아래 깊고 넓은 골짜기가 깃들어 있어 산은 한층 신비로웠다.
이런 풍광 덕분일까, 바람소리만 들리던 산봉은 구름안개가 벗겨지면서 산새가 곳곳에서 울어대고, 숲속에서 숨어 있던 잠자리들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군무를 추어댔다. 이제야 영남알프스의 맹주, 영남 최고봉 가지산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