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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에 지칠 때 산행이 약이 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생존의 불안 때문에 일중독 혹은 완벽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증상을 모른다. 누군가 옆에서 얘길 해줘도 불행한 삶의 패턴은 바뀌지 않으며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산은 이렇듯 고립된 현대인의 심리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치유하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산행의 과정이 일종의 자기 치유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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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인산 정상에서 비박한다. 하면에서 청평으로 이어진 불빛이 별빛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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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자연을 즐기고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근교 비박산행이 좋다. 약간 늦게 일어나 점심쯤 친구들을 만나 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차로 1~2시간만 가면 바로 산행할 수 있는 근교산을 오른다. 등산객들이 이미 하산하고 난 후인 오후 3시 이후에 산에 들어 조용한 걸음을 음미하는 것이다. 3시간 이내에 비박지에 닿아 장비를 풀고 노을을 배경 삼아 저녁을 음미하면 된다. 저녁이 깊어 별들의 잔치가 시작되면 사람의 마음도 자연에 동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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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소망능선의 잣나무숲길. 그늘이 짙어 여름에도 선선한 편이다. 2 정상 아래의 장수샘. 정상 경치만큼이나 기막힌 물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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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에서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건 적에게 무방비로 몸을 노출시키는 거라 믿는 사람들도 이 밤만큼은 무장해제가 된다. 몸과 마음에 좋은 느린 산행을 위해 산으로 든다. 목적지는 가평 연인산(1,068m) 꼭대기다.
연인산(戀人山)은 이름을 개명한 산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로 손꼽힌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는 1,068.2m로 표기된 무명봉이었다. 그러나 산 아래 상판리 주민들은 우목봉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문헌에는 산 위로 달이 떠오른다 하여 월출봉이라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연인산이란 이름은 1999년에 생겼다. 가평군 지명위원회가 등산인과 관광객에게 지역의 산을 정확하고 친근감 있게 알리기 위해 붙였다. 덕분에 뛰어난 산세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던 연인산은 찾는 이가 급격히 늘어 2007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낭만적인 이름 덕분에 젊은 연인들이 찾기도 하는데 이들 때문에 생긴 별명이 ‘연인 깨기산’이다. 연인산은 경기도에서 드문 1,000m대 산으로 정상까지 최소 2시간 이상, 산행 시작지점에서 해발고도 최소 700m 이상을 끌어올려야 하는 큰 산이다. 등산 경험이 적은 젊은 연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예상치 못한 산행의 힘겨움에 다툼을 벌여 연인 사이가 종종 깨진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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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소망능선과 장수능선이 만나는 지점인 879m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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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랜드’라는 낡은 간판을 지나 오르면 축구장 두 개 크기의 공원에 닿는다. 공원이라지만 휑한 공터만 있을 뿐, 주차장인지 캠핑장인지 용도를 알 수 없다. 공터 끝에 대형 등산안내도가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백둔리 소망능선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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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연인산 정상에서 본 해넘이. 2 정상 귀퉁이 흙으로 된 4~5평 정도 공간에 비박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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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잣나무숲이 사람을 맞는다. 순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듯 시원하다. 향기로우면서도 톡 쏘는 야성의 숲 냄새, 머리가 맑아진다. 잎사귀를 스쳐온 햇살의 초록빛에 눈이 시원하다. 솔잎 쌓인 흙길은 푹신해 디딜 때마다 편안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흠뻑 땀이 흐르지만 걸을수록 몸이 개운하다. 잣나무숲의 숨결이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음이다.
산행 초반, 아직 호흡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산은 사정 봐주지 않고 오르막을 들이민다. 동행한 이는 오랜 산행 동료인 안명선(아이더 검단산점장)씨다. 폭염의 힘이 가장 센 8월 초지만 선선하다. 더위가 한 풀 꺾인 오후 5시, 흐린데다 평소 없던 바람마저 분다. 산행도 오르막이지만 힘들지 않고, 땀이 나지만 금방 마른다. 잣나무 뿌리가 곳곳에 드러날 정도로 산객이 많은 코스지만 마주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시원한 고요를 묵묵히 즐기며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