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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호지(斗湖池)

호젓한오솔길 2012. 9. 16. 00:18

 

두호지(斗湖池)

 

옛날 예맥(濊貊)의 어느 왕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마침 아첨 잘하는 한 신하가 아뢰었다.그 신하는 여자의 음모(陰毛)를 많이 모아 이불과 방석을 만들어 덮고 자기도 하고, 깔기도 하는 등 항상 여자의 음모 위에서 생활하는 것이 장생불사의 묘약이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온 나라에 명령을 내려 여자의 음모를 잘라 모으게 하여 방석과 이불을 만들어 깔고 덮고 살았으나 오십이 못되어 죽어 버렸다.


아첨꾼들로 득실거리는 이 나라의 신하 가운데 유독 충성스러운 군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안락군(安樂郡)의 군수로서 세상사람들이 존경하여 ‘ 안락공, 안락태수 ’ 라고 불렀다. 안락공은 백성들의 비참한 광경을 보다 못해 왕에게 상소도 올리고 충간도 하고 직소도 하였으나,왕은 충직한 신하의 간언을 용납할 줄 모르고 도리어 크게 노하여 그를 당장 잡아 참형(斬刑)에 처하라 하였다.


안락공은 포악한 정치의 제물이 되기보다는 나라 밖으로 망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이끌고 밤을 이용하여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예맥국을 탈출하였다.그리하여 남으로 내려와 신라 태화현 통양포(지금의 포항시 두호동)에 상륙하였다.


그런데,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곳에 오기는 하였으나 살아나갈 방도는 실로 막연하였다. 안락공은 부득이 그 부인과 아들을 통양포 장재(掌財)집의 식모로  맡겨두고 자신은 속세를 떠나 경주 기림사에 임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동양포 장재는 안락공이 떠난 후 미인인 부인에게 음탕한 마음을 품고  그  아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며 먼 곳으로 쫓아 보내고는 부인이 혼자 있는 틈을 노려  자기의 야욕을 채우고자 회유와 협박을 하였다.하지만 정숙한 부인이 끝내 거절하므로, 장재는 어느 날 밤 부인을 죽이고 그 시신을 망연산 대밭 숲 속에 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장재의 집 사립문 앞에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중이 나타나 목탁을 치면서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하면서 시주를 청하였다.잔악하고 인색한 장재는 뜰 마당에 있는 쇠똥을 가리키면서 시주할 것은 앖고, 이 쇠똥도 좋다면 하겠다고 말하였다.


중은 빙그레 웃으며 쇠똥도 좋으니 시주를 하라며 바랑을 풀었다. 장재는 쇠똥을 가래로  떠서 바랑안에 넣어 주었다. 그래도 중은 장재 앞에 합장하고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돌아서니 장재를 위시하여 주위의 가복들이 박장대소하며 조소를 퍼부었다.


중이 장재집 사립문을 나와 수십 보를 걸어 나오자 홀연히 일진광풍이 어지럽게 불어닥치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벽력이 장재집 지붕위에 떨어지면서 그 집이 땅 속으로  함몰되기 시작했다. 장재집 사람들이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더니 장재집 터는 순식간에 못이 되고 말았다.


젊은 중은 언덕 위에 서서 아무 표정없이 함몰되어 가는 광경과 장재를 위시하여 전 가족이 죽어가는 아우성과 그 죽음의 최후의 순간을 지켜보고 합장배례하며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만 외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중은 안락공의 아들이었다.


안락공이 지림사에서 병을 얻어 죽은 후 그 아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버린 곳에 사찰을 건립하여 ‘안락사’ 라 부르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불을 빌하면서 한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장재집이 함몰하여 변한 못을 후세 사람들이 ‘ 안락지 ’ ,  ‘ 장재지 ’,  ‘ 두호지 ’ 등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의 포항시 두호동 동부초등학교 서쪽편에 있는 ‘ 새못 ’ 이라고 하는 못이 그 유적이라고 한다.

(자료 : 포항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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