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산(亡夫山)
포항시 용흥동에 위치한 연화봉(蓮花峰)은 흔히 솔개재라고도 하고, 연꽃봉 혹은 망부산(亡夫山)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 말엽 조정에 소랑(蘇郞)이라는 덕망이 높고 청렴결백하며 충직한 대신이 있었다. 소랑은 청빈하고 공평무사하여 부패한 조정 대신들 가운데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청백리로 백성들로부터 크게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 부인 또한 절세미인이어서 ‘ 장안 선녀 ’ 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고, 정숙한 부덕은 온 백성의 거울이 되어 왔다.
그런데 소랑의 부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임금은, 부인을 한반 만나보고자 기회를 노리던 중 조정에 출사(出仕)한 소랑에게 그 날밤 미행(微行)으로 소랑의 가정에 들고자 한다고 일렀다.
임금이 신하의 집에 거동한다는 것은 여간 신임이 두텁지 않고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소랑은 영광으로 생각하고 다급히 자기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는 한편,융숭한 대접을 하고자 연회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은 미복차림으로 소랑의 집에 당도하여 진수성찬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임금은 술이 얼큰히 취한 가운데 인사차 들어온 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매혹되어 이성을 잃고 부인을 범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임금은 그날부터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소랑을 죽이든지 삭탈관직하여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든지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사악한 계획을 세우기에 골몰하였다.
때마침 일본으로부터 사신이 와서 신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돌아간 후 그 답례로 일본에 파견할 사신을 선임해야만 했는데, 임금은 소랑을 적임자로 임명하였다. 소랑이 일본으로 간 후 임금은 그 부인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수 차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지조 높은 부인은 끝내 임금의 강압을 물리치고 결사 저항하였다.
임금은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자 부인을 죽여 버리고자 하였으나 외국사신으로 떠난 대신의 부인인 점과 임금의 체통을 고려하여 재산을 몰수하고 먼 곳으로 추방하여 버렸다.소랑부인은 소랑이 타던 말과 개, 그리고 노비 한 사람을 데리고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동쪽 바다가 잘 보이는 연화봉에 올라 움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낮이나 밤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 소랑이 돌아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간 소랑은 충실하게 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에 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불행하게도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낭군의 슬픈 소식을 전혀 알 길 없는 소랑부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화봉 움막에서 오직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병이 들어 5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소랑이 타던 말과 개도 돌봐주던 주인을 잃고 산지사방으로 헤매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오직 한 남자의 지어미로 일부종사(一夫從事)의 굳은 정절을 지키다가 죽어간 소랑부인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부인을 추모하여 후히 장례를 지내는 한편, 말과 개의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으며,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삼간초옥(三間草屋)을 건립하여 부인의 혼백을 모시고는 망부사(亡夫祠) 라 이름지어 부인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연유하여 이 산을 망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포항시 용흥동 연화재에 오르는 국도변에 소랑부인의 정절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자료 : 포항시사)
'♥ 오솔길 사랑방 ♥ > 기타,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림산(竹林山) (0) | 2012.10.03 |
---|---|
쌀알이 떨어졌던 국구암(國救庵) (0) | 2012.09.28 |
금정(金井)과 광명을 찾은 소경 (0) | 2012.09.21 |
흥해 회화나무 (0) | 2012.09.21 |
공진거랑과 등대산 (0) | 2012.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