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와 인연의 상징이자 뱃속 달래줬던 잔치국수
변치 않는 1000년의 잔치 음식
몇십년 전만 해도 혼인 잔치에는 으레 국수를 삶아 손님 접대를 했다. 잔칫집의 아래위 몇 집들은 방과 부엌을 하루 이틀 동안 혼주에게 내주었다. 잔칫집 국수 삶는 일은 청년들 몫이었다. 동네 청년들은 대처에서 국수를 관(貫)이나 짝으로 사다가 이웃집 부엌에서 연신 삶았다. 다 삶은 국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국물을 붓고 고명을 얹어 손님상으로 내갔다. 꾸역꾸역 모여드는 손님을 치르느라 하얀 국수발은 계속 가마솥으로 투하되었다.
국수를 삶으면서도 쉴 새 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웃는 청년들과 아주머니들, 흥성거리는 손님들, 가마솥 국수 끓는 소리, 국수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 등은 신명 나는 조화를 이루면서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를 만들었다.
잔치국수는 최소한 고려시대 사람들부터는 먹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잔치국수에 그 연원을 바로 연결시키기는 무리다. 하지만 잔치에 별식으로 밀로 만든 국수를 만들어 먹었음은 기록에 남아있다.
송나라 관리 서긍이라는 사람이 고려의 당시 모습을 기록한 책인「고려도경(高麗圖經)」에 관련 기록이 있다. 책에 따르면 중국에서 밀을 수입해오기 때문에 그 가격이 비싸고 귀해서 성례 때가 아니면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맛있는 음식이 십여 가지가 되지만 그중에 면식을 최고로 쳤다’는구절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제례에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밀로 만든 국수를 먹었던 흔적들이다.
왜 우리나라는 고려의 귀족에서부터 20세기 대한민국 농촌에 이르기까지 잔치음식으로 국수를 먹었을까? 국수가 혼인 등 경사스런 잔치 음식으로 등장한 것은 쫄깃함과 긴 모양이 아름다운 인연이나 장수를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서긍의 지적대로 밀이 귀했기 때문에 국수 맛을 본 사람은 일부 귀족이나 성직자 등 제한된 계층이었을 것이다. 상류층이라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상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려 말의 중국어 학습서인「노걸대(老乞大)」에는 고려 사람들이 국수 먹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기록도 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행사를 치르고 나서 먹는 국수를 쳐다보며 아랫사람이나 일반 서민들은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이 욕구는 약 800년 뒤에 해결된다.
‘국수’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을까? 일부에서는 우리의 제면법과 관계있는 것으로 본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나 서유구는 국수를 국수(掬水)로 표기했다. 납면법을 사용, 반죽을 늘려서 국수를 만들었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용기에 좁은 구멍을 뚫고 반죽을 통과시켜 면을 뽑아낸 착면법을 썼다. 제면 과정에서 구멍을 통과한 면발이 찬물에 떨어지는데, 물(水) 속으로 손을 넣어 이 면발을 움켜쥐어(掬) 건져낸다고 하여 ‘국수(掬水)’로 부른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일제 제면기 보급과 미국의 밀 유입으로 대중화
잔치국수에 쓰는 소면은 일제강점기에 생겼다. 일본인들이 가져온 소면 만드는 제면기가 국내에 퍼져 나갔다. 실처럼 생긴 소면을 뽑았던 이 제면기는 1970년대에도 건재했다.
필자의 고향인 경기 북부지방의 농촌에는 밀을 심었다. 그 밀을 추수하면 동네 방앗간에서 제분해 국숫집으로 가져갔다. 너른 마당에 기저귀를 널어놓은 것처럼 국숫발을 무수히 널어놓은 국숫집에는 국수 기계가 있었다. 밀가루를 맡겨두고 며칠이 지나면 우리가 맡긴 밀가루가 국수로 변신해 있었다.
밀가루에 소금을 넣고 반죽해서 기계로 국수를 뽑았다. 뽑은 국수는 횃대에 반으로 접어서 빨랫줄에 널듯이 말렸다. 마른국수는 절단기에 넣고 적당한 길이로 잘랐다. 자른 국수는 누런 포대종이나 신문지에 가지런히 말아 포장을 했다. 이것을 종이노끈으로 묶어서 나무 궤짝 같은 곳에 담아 지게로 져왔다.
그러나 차츰 밀농사가 사라졌다. 집에서 농사지은 밀가루는 색깔이 희지 않고, 벌레도 잘 났다. 그런데 새마을 사업의 노임으로 농가들에 지급된 미국산 밀가루는 때깔이 월등했다. 시중에서 사는게 농사지어 먹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혔다. 동네 방앗간의 제분기도 옆 동네 이씨가 운영했던 국수공장도 이때 사라졌다.
잔치국수는 일본처럼 멸치국물에 지단과 채소, 김을 얹어 먹는다. 그러나 참기름, 고춧가루, 깨 등의 양념이 들어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발전했다. 오랜 세월 육류 고기 국물에 익숙했던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멸치 국물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적응하고 나름대로 한국화한 셈이다.
잔치국수의 한국화가 가능했던 데는 일본식 제면기 보급과 한국 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밀가루 대량 유입이 크게 작용했다. 수백 년 전, 까마득하게 높은 곳의 일부 귀족들만 먹었던 국수가 갑남을녀의 혼인 음식에서도 누구나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요즘에는 다양한 잔치국수들이 나와 ‘국수호랭이’들을 즐겁게 한다. 가격도 2000원에서 5000원까지 다양하다. 고명도 호박, 계란 지단, 김, 당근에서부터 유부, 석이버섯, 표고버섯, 김치, 부추 등 기호에 맞게 선택할 여지가 늘어나고 있다. 국수의 핵심인 국물도 멸치와 디포리를 비롯해 통마늘, 고추씨, 대파(뿌리), 무, 해산물 등을 넣어 잔치국수 맛의 변화 조짐도 보인다.
중국, 일본, 이탈리아, 베트남, 태국 등 여러 나라 면식 요리에 힘을 못 쓰던 잔치국수가 최근에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전문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장기 불황의 여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반가운 일이다.
글·사진 제공 : 월간외식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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