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단석산 (827m)
* 위 치 : 경북 경주시 건천읍 산내리
* 일 자 : 2008.11.16 (일요일)
* 동행자 : 토끼와 거북이
* 산행코스 : 우중골 - 신선사 - 단석산 - 우중골
* 산행시간 : 약 4시간 소요 (느린 거북이 기준)
매년 이때쯤 이면 산꾼들은 갈곳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어제(11월 15일) 부터 내년 봄(4월 15일) 까지 산불경방 기간이라 호젓한 산길은 모조리 막히고 어디를 가나 산불 감시원들의 번뜩이는 는초리를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길이 열려있는 복잡한 국립, 군립 공원에나 뻔질나게 쫗아 다닐수도없고.. 산에 한번 잘못 가다가는 이 어려운 불경기에 기십만원의 벌금을 얻어맞는 쓰라린 맛을 보아야한다.
어제는 집안일이 있어 산행을 못하고 오늘 마눌 하고 산행을 하기로 약속 해놓고 머리속으로 근교 산들을 다 꼽아 보아도 산길이 열려있는 산은 모두다 여러번 다녀왔어 땡기는 곳이 없다. 어머님이 포항에 나와 계시어 고향의 산골짜기를 더듬으로 가기도 그렇고하여 생각한 곳이 경주시에 있는 단석산이다. 단석산은 그간 여러번 다녀왔지만 마눌은 처음 가는 곳이다.
아침 10시가 넘어서 느즈막하게 출발하여 경주쪽으로 가다가 경주를 우회하는 자동차전용 도로를 따라서 건천으로 향한다. 산업 도로가 끝나면 청도로 가는 국도 20번으로 이어진다. 좌측에 송선저수지를 끼고 당고개 쪽으로 조금 올라 가다가 좌측으로 신선사를 알리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우중골이다. 마을 어귀에 산불감시원이 지키고있다. 이름과 주소 를 기록하는 입산 신고를 하고 신선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차들이 빼곡히 들어와있다.
산행 준비를 하여 올라가니 늦은 시간이라 벌써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종종 만난다. 신선사로 올라가는 포장된 임도에는 낙엽이 떨어져있어 바스락 거리며 걸어가는 운치가 새롭다. 시멘트 포장된 임도가 끝나고 4륜 구동차만 다닐수 있는 비알길을 따라 700 미터 올라가면 아담한 신선사가 나오고 맞은편에 있는 국보 제199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사진에 담고 나면 단석산 정상까지는 1Km의 낙엽길이 이어진다..
*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돌아본 우중골의 가을 풍경..
* 우중골 산행 들머리에 설치된 단석산 안내판...서라벌에서 가장 깊은 산이란다..
경주 단석산(827m)
경주국립공원 구역에 속하는 단석산은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를 지키는 자연산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쪽의 토함산(745m),서쪽의 선도산(381m), 남쪽의 금오산(494.4m), 북쪽의 소금강산(142.6m)과 함께 경주 오악 중 하나로 꼽혀온 단석산은 경주 일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수도장으로서 화랑의 호연지기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돌을 갈랐다"는 의미의 산 이름도 화랑의 수련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김유신이 칼로 베어냈다는 고단석(古斷石)을 비롯하여 산 곳곳에서 칼로 베어낸 듯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단석산이란 지명이 잘 어울리는 산이다. 단석산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굴사원이기도 한 화랑의 수련장이 있다. 1969 년 신라 삼산(三山) 학술조사단이 단석산 우중골에서 미륵삼존불이 새겨진 자연석굴사원인 상인암을 발견한 것이다.
단석산은 삼국통일의 주도 역할을 담당한 김유신이 수련한 산으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나와있다. 김유신은 화랑이 된 지 2년째인 17세 때 외침이 잦자 뜻을 세우고 단석산의 석굴에 들어가 수양을 쌓고 있던 중 한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전수해 주고, 또 하늘에서 내린 영험한 빛이 그의 칼에 내리치면서 바위를 잘라낼 수 있는 보검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은 그러한 하늘의 힘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단석, 김유신이 물을 떠 마셨다는 장군수(將軍水), 김유신이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吟馬池)등이 김유신의 설화와 연관된 것들이다.
* 신선사로 올라가는 상쾌한 가을길..
* 길가에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 돌아보니 벌써.. 힘이드는가 봅니다..
* 꼬부랑 낙엽길은 제법 길게 이어집니다..
* 차를 가지고 올라왔으면 이런 재미는 없겠지요..
* 아이들 제잘대는 소리 골짜기 소란합니다..
* 탐방로 아님.. 이라는 곳에 운치가 있습니다...ㅎ
* 어느덧 낙엽에 계절입니다..
* 신선사로 올라가는길 입구... 여기서 부터는 4륜 구동차만 통행이 가능하답니다..
* 올라가다 돌아본 풍경..
* 거북이는.. 오르막에선 자꾸만 처지네요..
* 가족 나들이 행렬입니다..
* 4륜구동 자동차만 올라올수 있는...좁은 신선사 주차장에 세워진 안내판입니다..
* 신선사의 전경..
신선사 [神仙寺]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사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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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화종에 소속된 사찰이다.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으며,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이 절에서 삼국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절이 들어선 단석산의 산 이름은 김유신 설화에서 유래한다.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뒤에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굴은 작은 암자처럼 쓰이고, 50m쯤 아래에 본절이 들어서 있다. 본절의 건물로는 관음전과 산령각·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석굴은 동남북 3면이 갈라진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지붕을 얹어 사용했다고 한다. 안쪽 벽에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조성 양식으로 보아 6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불상·보살상이 8구, 인물상이 2구 있으며, 주민들은 탱바위라고 부른다.
*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전경
* 돌아본 신선사 전경..
* 유리 지붕이 쉬워진..'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 주위에 때 늦은 단풍이 어우러집니다..
* 불상군 주위의 단풍..
신선사 마애석불(국보 199호)
단석산에는 신선사(神仙寺)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석굴사원지(石窟寺院址)가 있다. 이 바위에는 미륵불이 그려진 석화(石畵)가 있고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 석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산이 단석산이라고 명명되기는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이라고 한데 부터 알려지고 불려진 것이다. 장군이 화랑시절, 이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던 중 난승(難勝)이라고 하는 노도사 한분으로부터 신술(神術)을 익히고, 전수받게 되었다. 장군은 체득한 신술로서 큰 바위인 돌을 단칼에 잘라 두부 자르듯 양쪽으로 쫙 갈라 놓았다. 단석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단석산의 정상 조금 못간 자리에 서쪽이 트이고, 동남북쪽이 막힌 ㄷ자 모양의 자연석실이 있는데 그 아래 근세에 들어와서 세운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절을 신선사라고 한다. 이 자연적으로 갈라져 있는 석실은 신선사의 법당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며 구멍난 석실 위에 기와로 지붕을 덮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지방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영산(靈山)으로 모시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6,25사변이 터지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몰려 내려오면서 이 서면 건천 경계라 할 영천북안(永川北安)일대까지 밀고 남하해 내려왔었으나 영산인 단석산이 있는 서면과 건천에는 한발짝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군과 연합군의 공격 작전에 수없이 많은 인민군이 죽고 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때 인민군들이 후퇴를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서 부터였다.
서면(西面) 경주 경계로부터 들어서면 이 단석산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노인들은 경주 서면에 적들이 들어서지 못한 것은 단석산(斷石山)의 정기가 그렇게 막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영산 단석산은 바로 신라를 통일시킨 신라인의 영기이자, 건천 서면 사람들의 영기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설화에 얽힌 유래
화랑과 용화정신, 월생산(月生山)하면 생소하지만, 단석산 하면 우리 지방 사람치고 모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건천읍과 서면의 유일한 표적이기 때문이다. 읍에서 보면 서남에 위치한 이 산은 방내리와 모량리의 뒷산이 된다. 해발 827m의 높은 산으로 경주에서는 중악(中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산은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위치는 당시의 왕성에서는 서쪽으로 23리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장군이 소년시절 신검(神劍)을 얻어 왕성에서 가까운 월생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유신은 이 산속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가장 용맹한 검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바위돌을 상대로 정신적 기(氣)를 써서 단칼에 베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에 군데군데 베어진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지금도 흩어져 있다.
여기에 절을 지어 단석사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악의 석굴이 이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의 석굴과 일치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를 1969년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조사한 결과 일치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상인암은 원래 이름이 신선사였고, 주변 바위면에 새겨진 조각상은 미륵삼존(彌勒三尊)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미륵삼존상이란 보살상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선사에는 자연으로 된 석굴에 미륵삼존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 바위에는 이를 설명해 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해설에는 주존불(主尊佛)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창건 연대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 작품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이 신선사의 주존불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는 사실은 신라 화랑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 사실이라고 할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김유신 낭도는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용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것은 곧 신앙결사(信仰結社)의 의미를 뜻한다.
이 미륵이 출현하는 세계는 바로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이상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화랑들은 바로 이상세계의 도래(到來)를 정신적 염원으로 삼아 강건한 무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적 바탕은 바로 젊은 낭도들에게 정신적 기강이 되어 곧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 상인암에는 미륵삼존불 말고도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 - 국보199호)이 그려져 있다. 이 석굴은 동남북의 삼면이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암바위 석실을 이루고 있어서 이 석굴은 하나의 천연수도처가 되어 었다. 이 암벽에는 크고 작은 10여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고대석굴사원의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고 있다. 아마도 암벽 위의 천정은 목조의 골격과 기와로 덮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석굴사원이 대두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여러 개의 마애불상 속에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보살상이다.
이와 같은 반가사유의 금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 전역에서 현재 남아 있는 마애존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좌상 밑에는 인물상 두 구가 동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있다. 이 두 상은 향로와 나무가지 모양을 붙들고 있고, 의관은 고대 신라의 복식에 관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매우 중시하고 있다. 추정으로는 이들 두 사람은 이 석굴사원 조성을 맡고 있던 실제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것은 주전(主殿)의 존상에 공양상을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보다 요행한 것은 씌어진 명문 중에 판독이 가능한 구절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름이 신선사임이 분명하고, 동시 주존 삼존이 미륵불과 보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단석산의 마애조상이 있는 월생산은 6.25때 전쟁에도 확연히 그 의미가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명장 김유신의 용화도 혼과 단석산의 마애조상 염원으로 인민군은 영천 외곽 임포(林浦)일대까지 포진하여 경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재 -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거대한 암벽이 ㄷ자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었는데 원래는 여기서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이른바 석굴법당(石窟法堂)을 만들었었다. 신라(新羅) 최초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인 셈이다. 이 석굴의 바위면에 모두 10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새기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틔어진 곳이 입구였는데 이곳으로 들어서서 왼쪽이 되는 북쪽 바위에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本尊佛 )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 안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 반가사유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밑쪽에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供養) 올리는 공양상2구(供養像二軀)와 스님 한 분이 역시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이 역시 신라인(新羅人)의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바위가 단절되어 쪽문처럼 틔었고 다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면에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비록 딱딱하고 서툰 듯한 솜씨로 조성된 면도 있지만 중후한 체구와 둥글고 동안(童顔)적인 얼굴, U자 모양을 이루는 법의(法衣) 안에 내의를 묶은 띠매듭 등 전선방사(傳禪房寺) 삼존불(三尊佛, 보물 제63호)의 양식적 특징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하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장륙(丈六)의 미륵불상(彌勒佛像)이 확실하므로 당시의 신앙 경향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불상이라 하겠다.
동쪽과 남쪽의 바위면에는 마멸로 희미해진 선각(線刻)의 마애보살상(磨崖菩薩像)이 1구씩 새겨져 본존불과 함께 삼존불로 배치된 것 같으며 남쪽 바위 보살상 안쪽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어쨌든 이 석굴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자 7세기 전반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이 석불상군은 고신라(古新羅) 불교미술(佛敎美術)이나 신앙연구(信仰硏究)에 귀중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애불상군 상세설명
여래입상A(如來立像A) : 이 석굴의 주불(主佛)으로서 거대한 장방형(長方形) 1석(石) 전면에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식의 미소를 보이며 머리의 정상에는 2단의 육계 형이 특이하다. 삼도는 없고 내액의(內腋衣)가 엿보이는 통견의(通肩衣)로서 좌 우대칭의 조각기법을 따랐으며 법의(法衣)는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좌우 아래 까지 이르고 있다. 좌우 양수(兩手)는 다섯손가락을 펴서 여원인(與願印)과 시무 외인(施無畏印)의 통인(通印)을 하고 있다. 전체높이 약 7m로서 삼국기 마애불 의 최고(最古) . 최대(最大)의 작품이다.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 : 정면상으로 연화대좌와 원형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삼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경부에 삼도는 없고 상반은 나신(裸身)이다. 오른손을 꺽어 오른쪽 뺨에 대어서 사유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왼쪽 발의 무릎위 에 얹어서 통형(通形)의 반가형식(半跏形式)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의 형식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원위치를 지키고 광배와 대좌 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이다. 전체높이 109cm이며 얇게 조각 되어 있으나 각선은 분명하다.
여래입상B(如來立像B) : 보주형 두광이 있으나 밑의 연화좌는 분명하지 못하다.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 아래로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으며 왼손은 신측으로 나가서 굴내를 가리킨다. 정면상이며 전체 높이는 116cm이다.
보살입상(菩薩立像) :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보관(三角寶冠)을 얹었으며 삼도(三道)는 없다. 천의(天衣)는 양어깨로 걸쳤으며 배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두 팔에 걸 쳐서 몸측으로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왼손은 왼쪽 몸의 측면 밖으로 나가서 굴내를 기리킨다. 둥근 두광과 연화좌를 지니고 있는데 몸 체의 높이는 102cm이다.
여래입상C(如來立像C) : 이 곳의 세 입상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과 단판 복련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子葉)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둥글 고 큰 상호에 비해서 육계가 매우 적은 것도 특이하다. 두 눈은 부어 오른 초기 석불상의 특색을 지녔으며 두귀 또한 길고 삼도는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왼손에 걸쳐서 아래로 내려 뜨렸으며 신체 하단에는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위에 올려서 다섯손가락을 폈으며 왼손은 몸 밖으로 들어서 다 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은 왼손형식은 다른 두상과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동쪽 끝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나아가서는 굴내의 주존인 미륵여래 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는 듯하다. 이 상은 이곳의 4상중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주목 할만하다. 몸의 높이는 105cm이다.
인물상A : [인물상A] 동쪽 굴내부를 향하여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두 손으로 병향로(柄香爐)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독특한 관모를 썼으며 상하의제(上下衣制)의 구별이 주목된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상호의 두 눈은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위장부(偉丈夫)임 을 느끼게 한다. 몸의 높이는 122cm이며 아마 이 석굴 조성의 발원인으로 추정이 된다.
[인물상B] 인물상(A)에 비해 약간은 작으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과 자세와 의복이 동 일하다. 다만 두 손으로 수지형(樹枝形)을 잡고 있는 것이 앞의 상과 다를 뿐이 다. 역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여래입상-D(如來立像D) : 최하단에 자리 잡은 가장작은 입상으로서 우견편단이다. 몸의 높이는 57cm이며 조각연대는 다른 상에 비하여 늦은 감이 있다.
* 불상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 내부 암벽에 세겨진 불상 그림들을 담아봅니다..
* 단석산으로 가다가 돌아본.. 신선사 마애불상군..
* 마애불상군을 뒤로하고 단석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우중골의 가을 풍경..
* 낙엽길이 이어집니다..
* 어느덧 정상부에 올라 왔네요..
* 단석산 정상부에도.. 억새밭이 있네요..
* 동네 산악회 지인 부부를 만납니다..
* 정상에서 바라본 조망은.. 운무가 가리어 희미합니다..
* 커다란 정상석 주위에는 산꾼들로 붐비네요..
* 한참을 기다리니.. 우리 차지가 돌아오네요..
* 커다란 정상석에 붙어서 한장 담겨봅니다...ㅎ
* 주객이 전도된 듯.. 정말로 너무 크네요... 오늘 우리가 김유신 장군에게 큰 죄를 지은 듯 합니다..
* 정상석 뒷면입니다..
* 그 옛날 김유신 장군이 쪼갈린 돌... 원래는 단석산의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뒤방 노인 처럼 초라하게만 보입니다..
단석산과 김유신
신라 왕성에서 30여리 안팎에 높은 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은 중악(中岳) 서라벌(徐羅伐) 근교에서는 가장 깊은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험하고 깊은 산 속에 찾아온 한 소년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늠름한 용모와 초롱초롱한 눈빛, 꽉 다문 입술, 첫눈에 누가 봐도 예사스러운 소년같아 보이지는 아니 하였다. 무엇을 단단히 결심하고 입산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년은 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제계를 하고 올라가 가장 큰 바위 밑에 앉아 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꿇어 앉아 정성을 다하여 기도(祈禱)를 하기 시작하였다.
"적국들은 날로 무도하게 이 나라를 침범하여 언제나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이 몸은 미천한 존재로서 재주도 용력도 없사오나 장차 이 환란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게 하는 간절한 힘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정성껏 드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날이 밝아도 쉬지않고 계속 한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눈을 감고 며칠이고 기도만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밤낮 기도하기를 나흘째 되는 날,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것처럼 한 노인이 소년 앞에 홀연이 나타났다. 갈색의 옷을 몸에 걸치고, 흰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흡사 신선과 같기도 하고 도사처럼 위엄도 있었다. 소년은 눈을 번쩍 뜨고, 놀라서 이 노인을 쳐다 보았다. 노인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어 소년을 향해 물었다. "여기는 깊은 산속이며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인데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없이 뭣 때문에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고?" 소년은 노인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신을 빼앗긴 채 노인의 얼굴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시며 존명은 어찌되시는지 알고자 하옵니다."
소년의 당돌한 이 물음에 노인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으면서 나는 일정한 거쳐가 없고, 인연에 따라 바람처럼 오고 가는 사람인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하지." 이말을 들은 소년은 예사스러운 노인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신분을 공손하게 아뢰었다. "저의 이름은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늘 괴롭히는 적국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큰 포부로 기도를 드리고 있사옵니다.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어른께서는 예사로운 분이 아니심을 짐작할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노인은 소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마음 속으로 이 노인이 더욱 예사스러운 어른이 아님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간청을 되풀이하였다. 이 간청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여섯, 일곱 차례까지 매달리듯 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노인은 못이긴듯 입을 열었다.
"너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니 참으로 놀랍고, 그 기개가 가상하구나. 너의 뜻이 기특하고 정성이 갸륵하므로 내 힘이 닿는데까지 도와 주겠다." 소년 김유신은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고마워하였다. 열흘, 보름, 스므날 소년은 노력을 다한 까닭에 놀라운 속도로 무예의 비법을 터득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가르침을 다 했을 때 노인 난승은 소년을 불러 앉혀 놓고, 조용히 당부를 하였다. "너에게 내가 가르친 이 비법(秘法)은 삼가 써야하며 망령되게 남에게 함부로 누구에게 전해도 안되고, 또 옳다고 하는 일에만 반드시 써야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해를 당할것이니 이것을 명심하여 새겨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난승노인은 이제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유신 소년은 스승이 가는 뒤를 쫓아갔으나 이리(二里)쯤 가다가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산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서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다만 없어진 산 위에 오색 안개가 자욱할 뿐이었다. 소년 김유신은 그때서야 그 노인이 자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늘에서 보낸 사자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수도를 마친 김유신은 난승에게서 받은 보검을 써서 자신이 수도하는 곳에 있던 바위를 마치 두부를 쪼개듯 두쪽으로 갈라 놓았는데 그때부터 이 산을 단석산(斷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산에는 전설을 뒷바침하는 것과 같이 칼로 잘랐다고 밖에 볼수 없는 갈라진 큰바위가 있다.
* 뒷방 노인네 옆에서도.. 한장 담겨봅니다..
* 당고개 쪽으로 내려 가다가 우측 골짜기로 내려 갈려는데..길을 막아버렸네요.. 걸리면 자연공원법에 저촉되어 벌금이라고 하는데..막을려면 정상에서 부터 막던지 해야지 이제 와서 막으면 어찌하라구요...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수도 없고 어쩔수 없이 그냥 우측으로 통과합니다..
* 이곳은 통제구역 이라 호젓합니다..
* 낙엽과 마른 단풍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합니다..
* 골짜기로 내려오니.. 아직 가을의 끝자락 생기가 돕니다..
* 커다란 바위 아래.. 공을 드리는 곳이 있네요..
* 두 가구가 살고 있는 독가촌입니다..
* 오막살이 라고 해야 하나요..
* 옮기는 자욱마다..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 내려 오다.. 돌아본 독가촌..
* 가을의 끝 자락이 머무는 곳..
* 가을이 떠나기 싫어.. 골짜기에 깊숙히 숨어있는 곳..
* 칡넝쿨 감아올린 감나무에는.. 감이 홍시로 변해가고 있네요..
* 낙엽의 길을 따라 내려옵니다..
* 낙엽이 흐드러진 곳..
* 낙엽이 머무는..정겨운 길위에는..
* 오가는 사람들 즐겁게만 보이네요..
* 발걸음 가벼운.. S 라인을 따라...
* 잎이 말라가는 국화는 가을 빛을 토합니다..
* 성한것으로 몇 송이 담아봅니다..
* 담 모퉁이에 노란 국화도..
* 탐스럽게 피어있습니다... 저무는 가을날에..
* 주차장 주변에서 철 없는 달맞이꽃을 담으면서..늦 가을 단석산 산행을 마무리해봅니다..
2008.11.16 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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