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한바위에 올라
솔길 남현태
고향에서 병술년 새해 차례를 마치고 나니 한가한 시간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옛 동산이 나를 부르는듯하여 그냥 집안에서 가족들과 고스톱으로 때우기에는 너무나 다사로운 날씨라 차에서 배낭을 꺼내 주섬주섬 챙겨 메고 혼자 뒷산으로 올라가며 오랜만에 내려다보는 고향 마을 풍경이 감회롭다. 뒷동산에서 바라본 먹방골 마을도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당못 샘못 마을과 장터 마을도 하얗게 보인다.
어릴 적에 나무 지게를 지고 다니던 무시랍등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은 잡목들로 우거져 헤치고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간간이 남은 산길은 고라니 등 산짐승들이 즐겨 다니는 오솔길로 변해 있다.
하얀 눈 위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고라니와 노루 발자국 널려 있는데 그래도 낙동정맥에 올라서니 산꾼들의 발자취에서 사람 냄새가 나는듯하다.
낙동정맥 능선에서 나무 사이로 바라본 먹방골과 뒷머리 마을 풍경이 정겹고, 하얀 눈을 뒤집어쓴 논도가리와 밭떼기들은 겨우내 쉬면서 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쌓인 눈길에 따뜻한 햇살이 비치니 눈이 부시다. 낙동정맥 쉬어가는 길 칠칠 육봉에서 낙동 길과 헤어지고 후미진 길로 들어서 한바위 쪽으로 향한다.
한바위 가는 음지에는 낙엽 위에 눈이 많이 쌓여서 때로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고 사람도 짐승도 다니지 않는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면서 가는 마음이 설렌다. 이미 눈이 다 녹은 따스한 양지쪽에는 바스락 낙엽 소리를 내더니 잠시 후 한바위의 우람한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한바위 근처에 웅장한 노송의 늠름한 모습에 가던 걸음을 멈춘다.
아래에서 쳐다보는 한바위 모습 가마득하고 경치가 가히 어느 명산의 한 부분으로 손색이 없다. 한바위 정상은 매우 넓고 사방으로 조망이 확 트여 먹방골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오무등 향로봉까지 속 시원하게 보인다.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한바위에 호랑이 굴이 있다는 이야기를 늘 들으면서 자라 왔지만, 이곳에 호랑이 굴은 없는 것 같고 조망이 아주 좋아 야간에 맹수들이 앉아서 주위를 살피기는 그만인 곳인 것 같다. 그 시절엔 밤에 마을에서 쳐다보면서 범 불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어릴 적엔 한 번도 이곳 한바위 근처에는 무서워서 와 본 적이 없었고 최근에 등산하면서 이번이 세 번째 올라왔으나 올 때 마다 너무나 편안한 곳이다. 바위에 올라와 내려다보니 사방이 낭떠러지로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 옛날에 마을의 아이들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바위에서 상옥1리 쪽으로 걸어온 능선길이 아름답고 멀리 괘령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내려다본 오막한 도장골 골짜기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한바위 위에 비스듬히 몰골이 사나운 난쟁이 소나무는 이곳 겨울바람의 세기를 느끼게 한다.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에서 사과를 한 개를 꺼내서 한입 가득 깨무는 순간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 그 촉감이 너무나 부드러워 감미롭다. 주위엔 아직 잔설이 분분한데 봄은 벌써 말없이 내 곁에 와 있었다. 돌아오는 양지쪽의 바스락 갈색 낙엽길이 너무나 포근하고 외로운 새 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정답게 들린다.
올라올 때 눈길에 새겨진 외로운 발자국을 따라 흥겹게 콧노래 부르며 내려오다 통점재에서 낙동정맥 들머리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모님들하고 손님들이 많이 왔다기에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오니 여동생들과 제매들 5남매 가족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모였다. 부모님 포함 한 총 23명 우리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인 것 같다. 너무나 반갑고 찾아온 동생들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금년 한해도 운수대통할 예감이다. (2006.01.26 병술년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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