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단석산(827m)
2006.09.10 (일) 호젓한오솔길
어제 토요일 단체로 월악산 가는 산행을 개인사정으로 포기한 아쉬움에.. 오늘은 2년 전 이맘 때 쯤 다녀 온 서라벌에서 제일 깊다는 단석산으로 가기 위해 경주시 건천읍 우중골로 찾아든다.. 언재 부턴가 혼자 산행을 갈 때는 장거리 운전이 마음에 걸려 가급적
가까운 곳을 즐겨 찾게되는것은 그만큼 늙어 간다는 증거인가...!!
아침에 일찍 서두른 관계로 08시 50분에 우중골에 도착하니 골짜기가 한산하여.. 길 옆에 적당한 장소를 골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 우중골 입구에 주차를하고.. 좁은 차길을 그냥 걸어서 올라간다..
* 단석산 안내 표지판.. 서라벌에서 가장 깊은 산.
* 길가에서 폭포 소리가 요란하길레..
* 건너편에.. 팔뚝 만한 초불을 여러게 켜고 기도를 했던 자리가..
* 비 포장 도로를 조금 지나니.. 신선사로 올라가는 길이 포장이 되어있다..
* 개울물 소리가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진다..
* 작은 폭포 옆에서는 어느덧 한기를 느끼며..
* 길 옆에는 온통 물봉숭아 등 야생화가..
* 이 깊은 골짜기에도 민가가 두체 있었다... 오두막집.
* 오두막 주위에서.. 텃밭을 일구고..
* 커다란 바위 아래.. 기도를 올리는 자리인가 보다..
* 정상 부위에서 둘러 본 조망.. 멀리 낙동정맥길의 OK 목장이 보인다..
* 운무가 뿌연것이 조망이 가이 좋지는 못하다..
* 우측에 낙동정맥길 당고개도 보인다..
* 단석산 정상석.. 김유신 장군이 칼로 잘랐다는 바위..
* 뒷쪽에서 바라 본 단석의 모습
단석산과 김유신 =출처:단석산 아랫마을 이야기=
신라 왕성에서 30여리 안팎에 높은 산이 하나 있다. 이 산은 중악(中岳) 서라벌(徐羅伐) 근교에서는 가장 깊은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험하고 깊은 산 속에 찾아온 한 소년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늠름한 용모와 초롱초롱한 눈빛, 꽉 다문 입술, 첫눈에 누가 봐도 예사스러운 소년같아 보이지는 아니 하였다. 무엇을 단단히 결심하고 입산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소년은 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제계를 하고 올라가 가장 큰 바위 밑에 앉아 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꿇어 앉아 정성을 다하여 기도(祈禱)를 하기 시작하였다.
"적국들은 날로 무도하게 이 나라를 침범하여 언제나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이 몸은 미천한 존재로서 재주도 용력도 없사오나 장차 이 환란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게 하는 간절한 힘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정성껏 드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날이 밝아도 쉬지않고 계속 한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눈을 감고 며칠이고 기도만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밤낮 기도하기를 나흘째 되는 날,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것처럼 한 노인이 소년 앞에 홀연이 나타났다. 갈색의 옷을 몸에 걸치고, 흰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흡사 신선과 같기도 하고 도사처럼 위엄도 있었다. 소년은 눈을 번쩍 뜨고, 놀라서 이 노인을 쳐다 보았다. 노인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어 소년을 향해 물었다. "여기는 깊은 산속이며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인데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없이 뭣 때문에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고?" 소년은 노인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신을 빼앗긴 채 노인의 얼굴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시며 존명은 어찌되시는지 알고자 하옵니다."
소년의 당돌한 이 물음에 노인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으면서 나는 일정한 거쳐가 없고, 인연에 따라 바람처럼 오고 가는 사람인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하지." 이말을 들은 소년은 예사스러운 노인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신분을 공손하게 아뢰었다. "저의 이름은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늘 괴롭히는 적국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큰 포부로 기도를 드리고 있사옵니다.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어른께서는 예사로운 분이 아니심을 짐작할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노인은 소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마음 속으로 이 노인이 더욱 예사스러운 어른이 아님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간청을 되풀이하였다. 이 간청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여섯, 일곱 차례까지 매달리듯 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노인은 못이긴듯 입을 열었다.
"너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니 참으로 놀랍고, 그 기개가 가상하구나. 너의 뜻이 기특하고 정성이 갸륵하므로 내 힘이 닿는데까지 도와 주겠다." 소년 김유신은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고마워하였다. 열흘, 보름, 스므날 소년은 노력을 다한 까닭에 놀라운 속도로 무예의 비법을 터득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가르침을 다 했을 때 노인 난승은 소년을 불러 앉혀 놓고, 조용히 당부를 하였다. "너에게 내가 가르친 이 비법(秘法)은 삼가 써야하며 망령되게 남에게 함부로 누구에게 전해도 안되고, 또 옳다고 하는 일에만 반드시 써야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해를 당할것이니 이것을 명심하여 새겨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난승노인은 이제는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유신 소년은 스승이 가는 뒤를 쫓아갔으나 이리(二里)쯤 가다가 갑자기 온데 간데 없이 산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서 사방을 살펴 보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다만 없어진 산 위에 오색 안개가 자욱할 뿐이었다. 소년 김유신은 그때서야 그 노인이 자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늘에서 보낸 사자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수도를 마친 김유신은 난승에게서 받은 보검을 써서 자신이 수도하는 곳에 있던 바위를 마치 두부를 쪼개듯 두쪽으로 갈라 놓았는데 그때부터 이 산을 단석산(斷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산에는 전설을 뒷바침하는 것과 같이 칼로 잘랐다고 밖에 볼수 없는 갈라진 큰바위가 있다.
* 단석산 정상에서의 조망..
* 오늘 산행은 땀도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정상이다..
* 이리저리 둘러 보며 한참을 노닐다 보니...
* 바람이 서늘하다.. 한기를 느낄 정도로..
* 가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풀들을 바라보다..
* 단석산 정상을 뒤로하고..
* 능선길 억새풀들 속에서..
* 커다란 불개미 집..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본다..
* 스틱으로 쿡쿡 찔럿더니.. 바글바글 온동네가 날리다...
* 이름모를 버섯들이..
* 참으로 이상하게 생겼다..??
신선사 마애석불(국보 199호) =출처:단석산 아랫마을 이야기=
단석산에는 신선사(神仙寺)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석굴사원지(石窟寺院址)가 있다. 이 바위에는 미륵불이 그려진 석화(石畵)가 있고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 석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산이 단석산이라고 명명되기는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이라고 한데 부터 알려지고 불려진 것이다. 장군이 화랑시절, 이 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던 중 난승(難勝)이라고 하는 노도사 한분으로부터 신술(神術)을 익히고, 전수받게 되었다. 장군은 체득한 신술로서 큰 바위인 돌을 단칼에 잘라 두부 자르듯 양쪽으로 쫙 갈라 놓았다. 단석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단석산의 정상 조금 못간 자리에 서쪽이 트이고, 동남북쪽이 막힌 ㄷ자 모양의 자연석실이 있는데 그 아래 근세에 들어와서 세운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절을 신선사라고 한다. 이 자연적으로 갈라져 있는 석실은 신선사의 법당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며 구멍난 석실 위에 기와로 지붕을 덮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지방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영산(靈山)으로 모시고 믿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6,25사변이 터지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몰려 내려오면서 이 서면 건천 경계라 할 영천북안(永川北安)일대까지 밀고 남하해 내려왔었으나 영산인 단석산이 있는 서면과 건천에는 한발짝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군과 연합군의 공격 작전에 수없이 많은 인민군이 죽고 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때 인민군들이 후퇴를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서 부터였다.
서면(西面) 경주 경계로부터 들어서면 이 단석산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노인들은 경주 서면에 적들이 들어서지 못한 것은 단석산(斷石山)의 정기가 그렇게 막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영산 단석산은 바로 신라를 통일시킨 신라인의 영기이자, 건천 서면 사람들의 영기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설화에 얽힌 유래
화랑과용화정신
월생산(月生山)하면 생소하지만, 단석산 하면 우리 지방 사람치고 모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건천읍과 서면의 유일한 표적이기 때문이다. 읍에서 보면 서남에 위치한 이 산은 방내리와 모량리의 뒷산이 된다. 해발 827m의 높은 산으로 경주에서는 중악(中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산은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위치는 당시의 왕성에서는 서쪽으로 23리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장군이 소년시절 신검(神劍)을 얻어 왕성에서 가까운 월생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유신은 이 산속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가장 용맹한 검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바위돌을 상대로 정신적 기(氣)를 써서 단칼에 베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에 군데군데 베어진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지금도 흩어져 있다.
여기에 절을 지어 단석사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악의 석굴이 이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의 석굴과 일치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를 1969년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조사한 결과 일치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상인암은 원래 이름이 신선사였고, 주변 바위면에 새겨진 조각상은 미륵삼존(彌勒三尊)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미륵삼존상이란 보살상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선사에는 자연으로 된 석굴에 미륵삼존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 바위에는 이를 설명해 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해설에는 주존불(主尊佛)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창건 연대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 작품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이 신선사의 주존불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는 사실은 신라 화랑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 사실이라고 할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김유신 낭도는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용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것은 곧 신앙결사(信仰結社)의 의미를 뜻한다.
이 미륵이 출현하는 세계는 바로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이상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화랑들은 바로 이상세계의 도래(到來)를 정신적 염원으로 삼아 강건한 무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적 바탕은 바로 젊은 낭도들에게 정신적 기강이 되어 곧 삼국통일을 이룩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 상인암에는 미륵삼존불 말고도 마애조상군(磨崖彫像群 - 국보199호)이 그려져 있다. 이 석굴은 동남북의 삼면이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암바위 석실을 이루고 있어서 이 석굴은 하나의 천연수도처가 되어 었다. 이 암벽에는 크고 작은 10여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고대석굴사원의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고 있다. 아마도 암벽 위의 천정은 목조의 골격과 기와로 덮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석굴사원이 대두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여러 개의 마애불상 속에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보살상이다.
이와 같은 반가사유의 금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 전역에서 현재 남아 있는 마애존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좌상 밑에는 인물상 두 구가 동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있다. 이 두 상은 향로와 나무가지 모양을 붙들고 있고, 의관은 고대 신라의 복식에 관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매우 중시하고 있다. 추정으로는 이들 두 사람은 이 석굴사원 조성을 맡고 있던 실제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것은 주전(主殿)의 존상에 공양상을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보다 요행한 것은 씌어진 명문 중에 판독이 가능한 구절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름이 신선사임이 분명하고, 동시 주존 삼존이 미륵불과 보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단석산의 마애조상이 있는 월생산은 6.25때 전쟁에도 확연히 그 의미가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명장 김유신의 용화도 혼과 단석산의 마애조상 염원으로 인민군은 영천 외곽 임포(林浦)일대까지 포진하여 경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재 -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거대한 암벽이 ㄷ자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었는데 원래는 여기서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이른바 석굴법당(石窟法堂)을 만들었었다. 신라(新羅) 최초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인 셈이다. 이 석굴의 바위면에 모두 10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새기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틔어진 곳이 입구였는데 이곳으로 들어서서 왼쪽이 되는 북쪽 바위에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本尊佛 )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 안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 반가사유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밑쪽에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供養) 올리는 공양상2구(供養像二軀)와 스님 한 분이 역시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이 역시 신라인(新羅人)의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바위가 단절되어 쪽문처럼 틔었고 다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면에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비록 딱딱하고 서툰 듯한 솜씨로 조성된 면도 있지만 중후한 체구와 둥글고 동안(童顔)적인 얼굴, U자 모양을 이루는 법의(法衣) 안에 내의를 묶은 띠매듭 등 전선방사(傳禪房寺) 삼존불(三尊佛, 보물 제63호)의 양식적 특징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하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장륙(丈六)의 미륵불상(彌勒佛像)이 확실하므로 당시의 신앙 경향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불상이라 하겠다.
동쪽과 남쪽의 바위면에는 마멸로 희미해진 선각(線刻)의 마애보살상(磨崖菩薩像)이 1구씩 새겨져 본존불과 함께 삼존불로 배치된 것 같으며 남쪽 바위 보살상 안쪽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어쨌든 이 석굴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자 7세기 전반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이 석불상군은 고신라(古新羅) 불교미술(佛敎美術)이나 신앙연구(信仰硏究)에 귀중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마애불상군 상세설명
여래입상A(如來立像A) : 이 석굴의 주불(主佛)으로서 거대한 장방형(長方形) 1석(石) 전면에 두껍게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둥글고 고식의 미소를 보이며 머리의 정상에는 2단의 육계 형이 특이하다. 삼도는 없고 내액의(內腋衣)가 엿보이는 통견의(通肩衣)로서 좌 우대칭의 조각기법을 따랐으며 법의(法衣)는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발좌우 아래 까지 이르고 있다. 좌우 양수(兩手)는 다섯손가락을 펴서 여원인(與願印)과 시무 외인(施無畏印)의 통인(通印)을 하고 있다. 전체높이 약 7m로서 삼국기 마애불 의 최고(最古) . 최대(最大)의 작품이다.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 : 정면상으로 연화대좌와 원형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삼면관을 쓰고 동안을 보이며 경부에 삼도는 없고 상반은 나신(裸身)이다. 오른손을 꺽어 오른쪽 뺨에 대어서 사유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린 왼쪽 발의 무릎위 에 얹어서 통형(通形)의 반가형식(半跏形式)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의 형식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원위치를 지키고 광배와 대좌 등을 구비한 고신라 유일의 마애석상이다. 전체높이 109cm이며 얇게 조각 되어 있으나 각선은 분명하다.
여래입상B(如來立像B) : 보주형 두광이 있으나 밑의 연화좌는 분명하지 못하다. 두정에는 육계가 있고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그 아래로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으며 왼손은 신측으로 나가서 굴내를 가리킨다. 정면상이며 전체 높이는 116cm이다.
보살입상(菩薩立像) : 정면상으로서 머리에는 삼각보관(三角寶冠)을 얹었으며 삼도(三道)는 없다. 천의(天衣)는 양어깨로 걸쳤으며 배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다시 두 팔에 걸 쳐서 몸측으로 길게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왼손은 왼쪽 몸의 측면 밖으로 나가서 굴내를 기리킨다. 둥근 두광과 연화좌를 지니고 있는데 몸 체의 높이는 102cm이다.
여래입상C(如來立像C) : 이 곳의 세 입상중 조각이 가장 선명하다.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과 단판 복련좌를 지니고 있는데 연화문에는 자엽(子葉)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둥글 고 큰 상호에 비해서 육계가 매우 적은 것도 특이하다. 두 눈은 부어 오른 초기 석불상의 특색을 지녔으며 두귀 또한 길고 삼도는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왼손에 걸쳐서 아래로 내려 뜨렸으며 신체 하단에는 치마(裳衣) 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위에 올려서 다섯손가락을 폈으며 왼손은 몸 밖으로 들어서 다 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이와 같은 왼손형식은 다른 두상과 동일하여서 마치 이들이 동쪽 끝에 있는 반가사유상과 나아가서는 굴내의 주존인 미륵여래 입상을 지칭하고 인도하는 듯하다. 이 상은 이곳의 4상중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주목 할만하다. 몸의 높이는 105cm이다.
인물상A : [인물상A] 동쪽 굴내부를 향하여 공양하는 입상으로서 두 손으로 병향로(柄香爐)를 잡고 있다. 머리에는 독특한 관모를 썼으며 상하의제(上下衣制)의 구별이 주목된다. 얇게 조각되어 있으나 상호의 두 눈은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 위장부(偉丈夫)임 을 느끼게 한다. 몸의 높이는 122cm이며 아마 이 석굴 조성의 발원인으로 추정이 된다.
[인물상B] 인물상(A)에 비해 약간은 작으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점과 자세와 의복이 동 일하다. 다만 두 손으로 수지형(樹枝形)을 잡고 있는 것이 앞의 상과 다를 뿐이 다. 역시 공양상으로 추정된다.
여래입상-D(如來立像D) : 최하단에 자리 잡은 가장작은 입상으로서 우견편단이다. 몸의 높이는 57cm이며 조각연대는 다른 상에 비하여 늦은 감이 있다.
* ㄷ 자 모양의 벽면에 온통 불상 그림이 세겨져 있다..
* 지붕을 만들어 덮어져 있는데.. 바위에서 풀은 자라고..
* 하산길에 탱글탱글 영글어 가는 밤송이...
* 우중골 입구의 작은 암자에 세워진 석탑...
암자 입구에서 부터 온통 수 십개의 대형 프라스틱 물통에 연꽃을 심어 놓았었는데.. 아직 수련이 몇 송이 피어 있길레 열심히 카메라에 주워 담았다..
* 배불뚝이 돌 부처는 무쓴 의미일까..?
* 화분에 국화가 가을 향기를 풍기고..
* 이름모를 하양꽃이 너무니 아름답다..
* 익모초를 마지막으로 찍으면서...
하산 길에는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매우 붐비었으며.. 신선사 까지 구경오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밀려 들어와 좁은길이 무척이나 몸살을 알고 있었다..
서늘 한 날씨에 비교적 짧은 산행길이라 등어리에 땀도 제대로 흘려보지 못하고 끝난 싱거운 산행이었다.. 그러나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라벌의 깊은 산중을 오르며.. 여기 저기서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수 있어 보람이 있었던 산행이다...
2006.09.10 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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